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 통신사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임진왜란]] 이전 [[무로마치 막부]]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[* 일본쪽에서 사신을 보내면 조선쪽에서 이에 대한 답으로 회례사를 파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. 대표적인 인물이 송희경이며 그가 쓴 [[일본행록]]이 자료로 남아있다.] [[오닌의 난]] 이후로 일본 전역이 [[센고쿠 시대|전란에 빠지며]]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[[오우치]] 등 지방 [[다이묘]]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.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가 일본을 통일해 [[센고쿠 시대|전국 시대]]를 끝내고, [[임진왜란]]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.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. 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, 그동안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. 이후 [[포로]]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[[사명당]]을 비롯한 '회답겸쇄환사(回答兼刷還使)'라는 사절을 파견한다.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[[임진왜란|문제]]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, 또 [[청나라|후금]](후일의 청나라)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.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[[1615년]] [[오사카 전투]]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. 그 후 [[에도 막부]]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,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[* 정확히 말하면 이렇지만 이름을 빼면 회답겸쇄환사나 통신사나 크게 다른 것이 없고, 이 때문에 조선이나 일본 측에서도 나중에는 처음 세 번은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였다는 것을 딱히 강조하지 않게 된다. 이에 이 둘을 합쳐서 통신사가 12번 파견됐다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.].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,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.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,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.[* 1636년, 1643년, 1655년 한정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는 닛코까지 올라가기도 했다.] 마이너 버전(?)으로 [[류큐 왕국]]에서 보낸 사절단인 류큐 사절(琉球使節)이 있으며, 이들의 에도 방문을 에도노보리(江戸上り)라고 했다. 류큐 왕국은 당시 일본 본토와 달리 [[청나라]]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궁금해했던 많은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졌다.[* 조선의 경우엔 소중화를 내세우면서 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에 중국의 사정이 궁금했던 일본 입장에서는 류큐가 나았다.] 류큐 사절단은 은사사, 하경사로 불렸는데 대등한 관계로 쇼군에게 바로 국서를 보낼 수 있던 조선과 달리 이미 일본에 예속되어 있던 류큐 국왕은 막부의 실력자인 로주들에게만 국서를 보낼 수 있었다. 조선 중후기 일본어 교재인 [[첩해신어]]는 동래 왜관에서 조선 통신사 관련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을 주제로 대사가 짜여 있다. 저자 강우성부터가 통신사로 일본에 몇 번 갔다 왔던 사람이고 실제 통신사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작성하여 관련 연구에 참고되기도 한다.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[[한양]]까지는 가지 않고 [[부산]] [[동래부]]까지만 왔다 갔다.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도쿠가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,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주변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.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를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. 원래는 수도 한양에서 치러야 하는 외교사신 맞이를 부득이하게 부산에서 했기 때문에 [[부산항]]에 '연향대청(宴享大廳)'이라는 큰 관청을 만들었고, 일본 측 사신은 여기서 조선 국왕을 모신 전패에 절을 해서 실제로 한양에서 왕을 만나는 행사를 대신했다.[* 지금은 연향대청 건물은 사라졌지만, 연향대청이 있던 동네는 대청이 있었다고 해서 [[대청동(부산)]]으로 이름이 남아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